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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 작전 (코드네임 크로마이트 작전)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인천에서 UN군과 대한민국의 국군이 펼친 작전으로 이를통해 6.25 전쟁당시 서울을 탈환하며 패색이 짙던 전쟁의 양상을 역전시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내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천상륙 작전 = 맥아더 장군 으로 기억할뿐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인천상륙작전의 간단한 정리와 숨겨진 영웅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배경


20세기 한국의 역사중 최악의 비극으로 꼽히는 6.25전쟁은 한민족의 이념차이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하였으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침을 강행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못한 우리나라 군대는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며 경상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전세를 뒤집는 선택


그당시 UN군사령관을 맡았던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전황을 한번에 바꿀 수 있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전락적 요충지인 인천에 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허리를 끊어서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게됩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상륙 조건이 좋은 군산과 평택 포승면 앞바다를 생각했는데 적의 보급선을 끊지 못하고 병력을 포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소신대로 인천 상륙작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해군의 일부 인사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5,000대 1 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과 국군은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 양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북한은 15일만에 다시 38선을 내주게 됩니다. 결국 인천승리작전을 통해 인천을 수복하고 유엔군의 반격의 계기를 만들면서 서울을 수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비밀첩보 X-RAY작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인천의 지형과 주둔해 있는 적군의 정보가 필요했는데 한국어 뿐만 아니라 인천의 지리를 모르는 미국의 부대를 투입하는건 사실상 불가능 했습니다. 때문에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이 첩보작전을 요청하고 임병래 중위를 포함한 총 17명의 해군 특수첩보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한 희생


첩보대의 활약으로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맥아더 장군은 X-RAY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는데 철수하려는 그들을 감지한 북한군이 영흥도를 기습하면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됩니다. 하지만 임병래 중위를 포함한 홍시욱 하사의 이등병 조는 적에게 체포될 위험에 빠지게 되고 기밀누설을 하지 않기위해 '대한민국만세'를 외친뒤 자결하였습니다.




인천 상륙의 숨은공신 켈로부대


인천항에 도착한 병력들이 무사히 상륙하기 위해서는 인천만 전체를 볼 수 있는 팔미도 등대를 탈환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켈로부대와 미군으로 구성된 한미 연합 특공대는 등대를 탈환하기 위해 팔미도에 주둔해 있는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켈로부대원 22명이 전사하게 되는데 남은 부대원들이 다시 출동해서 치열한 교전을 벌인끝에 팔미도 등대를 사수하고 불을 밝혀서 맥아더 장군과 11만명의 유엔 연합군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 하면 맥아더 장군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가 개봉해서 감상했는데 평소 고리타분하게 생각되는 한국의 역사를 영화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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