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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녀 평등을 위해서 활동한다는 워마드 라는 커뮤니티에서 안중근, 윤봉길 의사님을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려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여성 걸그룹 멤버가 안중근 의사를 긴또깡 이라고 말해서 우리나라의 젊은 친구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독립운동가를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린 정신나간 사람은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할수록 같은 한국인 이라는게 부끄럽네요.. 이번 시간에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군국주의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안중근의 어린시절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난 안중근은 태어날 당시 등 뒤에 7개의 점이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는 의미로 어린 시절에는 응칠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어린시절 부터 화승총을 사용해서 10m 떨어진 곳에서 동전을 맞출 정도로 사격을 잘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원래 교육 산업이나 민족의 계몽 운동을 주로 했지만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침략이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심해지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군을 조직하게 되었고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절실한 신앙심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은 가톨릭 세례명 토마스를 한자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고해성사를 요청했지만 당시 천주고 서울대교구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밑에있던 니콜라 빌렘 신부는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받아들였고 이후 사제로서 일을 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지만 항소하여 다른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천주교에서 안중근 관련하여 이야기가 많았지만 2011년에는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의 가족


안중근의 가족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아버지인 안태훈은 동학군을 이끌었는데 관군에 쫒기는 김구를 보호하게 되면서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어머니인 조 마리아 역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독립 운동에 가담했는데 나중에는 집안 구성원 대부분이 해외로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면서 현재는 미국이나 중국 북한에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그의 집안에 대해서 알려진 정보는 크게 없는편이다.





거사를 준비하다.

1909년 10월 21일 신문기사를 통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16일 중국의 하얼빈역에 방문하여 러시아와 일본간의 경제회담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자신은 목적지인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고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은 기차가 정차하는 곳인 차이자거우 역 등에서 거사를 분담하기로 한다. 하지만 작전에 문제가 생기면서 하얼빈역에 도착하기 전의 암살 계획은 모조리 실패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그 이후 하얼빈역에 정차한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내리는 순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FN M1900으로 그를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에서 호위하던 측근들에게도 총알을 발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했고 안중근은 체포 후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재판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만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편지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그가 죽고난 이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후 그의 장남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그런지 안중근의 차남 안중생은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치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고 일본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나중에는 일제의 압박에 의해서 꾸며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던 김구는 안준생을 죽이자고 주장하며 암살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 <백범일지> 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약지 손가락이 짧은 이유


1909년초 안중근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때 왼손 네번째 손가락 마디를 끊으면서 자신과 동료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결의를 다졌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님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 많은 명언을 남기셨는데 글을 읽다보면 자신의 열정을 모두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건 배우면 되는 일이지만 남을 욕되게 하는 분들에게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라는 안중근 의사님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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